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이타이 덴노 (문단 편집) ===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과 백제 무령왕과의 관계 ===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백제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이걸 가지고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게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가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진 덴노]]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 덴노]]의 7대손인 게이타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게이타이 덴노의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진 덴노는 제2왕조의 대왕('오오키미')이었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 덴노는 제1왕조의 대왕이었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게이타이 덴노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대왕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게이타이 덴노의 ‘게이타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 천황이 게이타이 덴노가 틀림없다면 게이타이 덴노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권오영 서울대 교수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등극하기 전의 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 <[[차이나는 클라스]]> 2020년 6월 방영분 중 >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계체(継体)입니다. 근데 그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에는 일본의 변두리에 있었던 작은 세력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전체 일본의 왕이 되는 데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스다하치만 신사에 거울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 국보입니다. 저기 글씨가 씌여져 있어요. (중략) 이 거울에 나와있는 내용이 한•일 학계의 수수께끼에요. 근데 분명한 것은 오오도{'남제왕'(男弟王)}라는 인물은 계체(継体)가 왕이 되기 전 본명이에요. 사마는 무령왕의 본명이고.. 그래서 게이타이가 왕이 되기 전에 무령왕이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이에 덧붙여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일본 국내에 있었던 태자와 왕후 등 일족들이 모두 죽어버린 대란을 전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더욱 의문스럽다. 자국에서 벌어진 참화를 《백제삼서》를 인용하여 전하는 것을 보면,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는 상당히 가까웠다고 유추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